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형주 공방전/평가 (문단 편집) === 타이밍 === [[조조]]가 죽고 [[조비]]가 후한을 찬탈한 220년이 북벌의 최적의 타이밍이라는 주장이 있다. 물론 [[조조]]가 죽고나서 북벌은 우리가 알고있는 북벌보다 파괴적일 수 있다. 그러나 타이밍은 결과론의 일부다. 북벌을 알고 있는 우리야 넓은 시각에서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저기는 말 그대로 역사를 써내려 가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말마따나 배신당한 거 다 빼고 가정하면 완 근방의 남양까지 압박했을 테고 허창을 목전에 두면 한실 해방의 기치를 실현한다는 대의도 직접 천하만민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고 또 위치 상 그렇게 되면 조조도 [[항우]]가 그랬듯 옹양주를 신경쓸 수 없게 되는 구도가 나온다. 전선 넓이에 따라서 솔직히 묘수였다고 볼 수 있다. 또 [[조조]]가 언제 죽을지는 후세인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지 당대인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후세인의 아쉬움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야 [[관우]] 북진 이후에 [[여몽]]이 죽고 [[조조]]가 죽은 걸 안 거지 그 당시에 그걸 알 수 있었을까? 당시 상황을 보면 [[한중 공방전]]에서 촉이 승리하고 상용까지 집어삼키고 [[유비]]가 한중왕에 정식으로 등극하였고 여기에 남양에서 후음의 반란까지 일어난 상황이다. 이걸 그냥 지켜만 보는 게 더 이상하다. 그 당시로만 보면 최적의 진격이다. 타이밍이 최악이라는 평가도 있다. 익주가 [[한중 공방전]]으로 숨을 가다듬고 있을 때 치고나간 것은 잘못이며 힘을 비축해 수년 후에 치고나가도 늦지 않을 것이라는 것. 그러나 한중공방전과 번성공방전은 거의 동 타이밍에 일어난 사건인 만큼 양측에서 치고 나가 어느 한 전선에만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하려 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익주와 형주의 연계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단순 추측에 불과하다. 게다가 당시 [[위나라]]는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던 만큼 [[관우]]가 치고 나가기 충분했다. 오히려 위나라가 반란을 진압하고 안정기에 들어서면 언제 치고 나갈지 알 수 없게 된다. 즉 반란 세력과 연계해 위나라를 끊임없이 혼란하게 하고, 그 사이 숨을 가다듬은 익주가 치고 나간다면 융중대의 완성이다. 하지만 당시 유비 세력은 융중대의 핵심인 손권 세력과의 연대가 전혀 되고 있지 않았다. [[관우]]의 북벌의 문제는 관우가 [[우금]]의 7군이 수몰되자 포로로 삼고 대장마저 사로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양번을 점령하는 전과 확대에 실패함에 있지, 관우와 유비 사이의 교감이나 익주의 지원이 문제는 아니었다. 결국 [[관우]]가 급변하는 전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급속도로 무너지면서 유비가 대처하지 못한 것이지 [[유비]]가 관망한 것은 아니다. 오를 냅두고 왜 북상했느냐면 이건 간단하다. 설마 동맹을 파기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촉에서 오의 배신을 예측한 인물이 과연 몇 명이었을까? 기껏해야 도발이나 대치 정도는 연례행사에 가깝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익양대치가 결과론적으로 동맹파기의 위험을 알리는 신호였으나 어쨌든 영토는 분할했다. 단 [[관우]] 본인은 [[오나라]]의 배신을 염두에 두어 [[여몽]]을 견제했고 형주에서 봉화로 알리면 바로 집에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을 했지만 문제는 내부와 외부의 태만과 배신이었다. 하지만 내부 관리를 소홀히 한 것은 관우다. 개국공신인 미방을 하대해 놓고 대비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관우의 능력부족이라는 것이다. 또한 조조 측에서 손권이 배신할 것이라는 정보를 흘렸음에도 서둘러 회군하지 않고 밍기적댄건 관우다. 동맹국의 군주를 지역 비하 발언을 사용하며 모욕하고 동맹국의 군량을 털어갔음에도 손권이 배신할 것이라는 정보가 들어왔을 때 손권이 실제로 배신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은 관우의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관우]]는 믿는 구석이 있으니 북상을 한 것이다. [[한중 공방전]]으로 세가 꺾였던데다 후음의 난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상용에서 유봉이 뭘 하고 있는지 과연 알고 있었을까? 상용이 어떤 상태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고려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냥 원군만 요청한 것이다. 이 또한 유비 세력 내부에서 제대로 연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결론은 타이밍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전략이 총체적 난국으로 익주의 유비, 상용의 유봉과 맹달, 강릉의 관우는 전혀 협력이 되지 않았다. 유비가 거주하던 성도는 사천 분지 내에서도 서남쪽에 치우쳐 있다. 상용, 강릉과 연계가 힘들다는 뜻이다. 한중 공방전에서 승리하고 조조의 세력 내부에서 반란이 터지던 시기에 북벌에 박차를 가하지 않고 관우의 북벌을 관망하고 있던 유비 또한 비판에서 피해갈 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